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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티나무가 만난 사람들 #15] 자원활동가 이평원 님을 만나다.

작성자 : 느티나무 작성일 : 2026-08-26 조회수 : 74

 * '느티나무가 만난 사람들'은 느티나무도서관이 직접 발로 뛰며 만난 지역 주민,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프로젝트입니다.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신문스크랩 자원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이평원 님. 
   매주 신문을 읽고, 오래 남길 만한 기사를 골라내고 있다. 그가 신문과 함께 한 시간은 수십 년에 이른다. 신문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이평원 님은 어떤 시간을 지나 느티나무에서 다시 신문을 펼치고 있을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피란 때 어린 시절이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대화 막바지, 여든이 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뒤 던진 질문에 이평원 님은 뜻밖에도 6·25전쟁 당시에 피란 시절을 꼽았다. 전쟁이 일어나 살던 집을 떠나야 했던 때였지만, 그의 기억에는 피란길의 고단함만큼이나 순수했던 그 시절의 풍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1944년생인 이평원 님은 1950년, 서울에 있는 금화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불과 몇 달 뒤인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됐고, 가족은 친척이 있는 화성으로 피란을 떠났다. 한강 다리가 폭파된 터라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먼 거리를 걸어야 했다. 때로는 지나가는 화물기차에 몸을 싣기도 했다. 피란길 중 지금 살고 있는 용인을 지나며 용인에 있던 친척 집에 들러 밥을 먹었던 기억도 남아 있었다. 

   “그 나이면 힘들다고 하고 어린애 같은 면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런 게 없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른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던 기억이 나요.” 폭탄과 총소리가 들리는 피란길. 국민학교 1학년 어린아이에게 쉽지 않았을 시간이지만, 이평원 님은 힘들다고 울거나 보채지 않았다.

전쟁 속에서도 잃지 않은 동심
   전쟁 중이라고 해서 어린아이의 일상까지 모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친척 집에 도착한 가족은 작은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그곳에서 학교도 다시 나갔지만, 전쟁 중인 탓에 상황은 열악했다. 학교 뒷동산에 칠판을 가져다 놓고 공부했고, 치약 대신 고운 모래로 이를 닦으며 위생 검사를 받기도 했다.
   이평원 님은 산에서 송홧가루를 따 먹고, 누나와 함께 수박이나 참외를 몰래 따 먹다가 혼이 났던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을 지었다. 바닷가에 물이 빠질 때면 그물에 걸린 생선도 먹고, 외삼촌이 하던 염전에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기도 했다.

   생계를 위해 아버지는 염전에서 일을 하고, 어머니는 서울에서 옷감이나 생활용품을 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팔았다. 어머니가 장을 보고 돌아오는 날이면 이평원 님과 누나는 마을 어귀로 마중을 나갔다. 서울에서 돌아오는 어머니의 보따리에는 시골에서는 쉽게 먹을 수 없던 과자와 사탕도 함께 들어 있었다. 
   “엄마가 먹으라고 과자나 사탕 같은 걸 사 오시는 거예요. 그러면 참 신나게 먹었지.”


   그렇게 화성에서 몇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피란 생활이었지만, 이평원 님은 그 시절을 고생으로만 기억하지 않았다. 
   “피란 때, 어린 시절이죠. 그때 시골에서 놀던 게 기억에 많이 남아요. 참 힘들었던 때지만, 나는 거기서 동심을 키우면서 몇 년을 살 수 있었어요.”
   누군가는 전쟁을 단순히 힘든 시절이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이평원 님의 기억 속에는 폭탄과 비행기 소리를 들으며 한강을 건너던 피란길부터 뒷동산의 교실, 수박과 참외밭, 바다, 어머니의 보따리를 기다리던 마을 어귀의 풍경까지, 어린아이의 동심과 추억이 함께 남아 있었다. 


다시 서울로, 또 다른 시대로
   전쟁이 끝날 무렵 이평원 님은 가족과 함께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처음 입학했던 금화국민학교로 돌아가 학교활을 이어갔고, 이후 수도중학교와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좀 더 열심히 해서 고등학교는 더 좋은 학교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 학창 시절을 이야기하며 이평원 님은 자신이 공부를 썩 잘한 학생은 아니었다고 여러 번 웃음과 함께 말했다. 




   공부에 대한 아쉬움과 함께, 그의 학창시절에는 교실 밖에서 마주한 시대의 역사도 자리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던 1960년에는 4·19혁명이 일어났고, 당시 시위에 나섰던 기억도 남아 있다. 이 때 훗날 몸담게 될 서울신문도 묘한 인연이 생겼다. 4·19혁명 도중 서울신문 건물에 불이 난 장면을 목격했고, 시간이 흘러 이평원 님은 그곳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가 거기에서 근무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라며, 그때는 몰랐지만, 서울신문은 훗날 이평원 님이 가장 오래 몸담은 직장이 되었고, 그곳에서 결혼까지 하게 됐다며 그 인연을 말했다. 


   국민학교 때는 전쟁을, 고등학생이 되어서는 4·19혁명이라는 격동의 시간을 마주하였다. 이평원 님의 학창 시절에서는 한 사람의 성장과 함께 한국 사회가 지나온 시간도 함께 찾아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다. 뒷동산 칠판 앞에서 공부하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사회에 나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첫 직장은 잡지를 만들던 학원사 편집부였다. 이후 신화일보에 들어가며 신문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그 인연은 서울신문을 거치며 오랜 시간 이어졌다. 


진정한 특종을 향해 달려왔던 신문사 생활


   느티나무도서관에서 벌써 반년 넘게 신문스크랩 자원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평원 님에게 신문스크랩은 낯선 일이 아니었다. 신문사에서 처음 일하게 된 곳이 ‘신문사의 도서관’이라 불리는 조사부였기 때문이다.  조사부는 신문사의 모든 자료와 정보가 모여 있는 곳이다.  신입 기자들은 정식으로 배치받기 전, 이곳에서 신문스크랩을 하며 기초를 다진다. 이평원 님 역시 이때 신문스크랩을 배우게 됐다.
   이후, 사회부나 경제부, 정치부 등 각 부서로 흩어질 때 이평원 님은 취재가 아닌 편집을 택했다. 신문사의 편집부는 마감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드라마 속 “빨리 올려!”라거나, “이런 걸 기사로 써온 거야!”가 매일마다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니라며 웃어 보였지만, 신문이 나오기 직전인 새벽 편집국은 항상 불이 난 듯 바빠졌다고 말했다. 기자들이 써온 기사를 받아 지면을 짜고, 기사마다 제목을 편집부의 일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마감이 넘어가면 잠시 평상시로 돌아왔다가도 다음 날이면 또다시 같은 긴장이 반복되었던, 치열했던 매일을 회상했다. 
   이러한 반복 속에서도 특종이 터지는 순간만큼은 남달랐다. 기자에게는 최고의 성취감을, 편집부에는 최고의 보람을 안겨주는 순간이라고 했다. 더불어 특종은 단순히 사실을 빠르게 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기사 자체의 품질과 편집부의 지면 구성, 제목이 모두 함께 작용해야 진정한 특종이 되는 것이죠.”

   이평원 님은 그런 순간들 덕분에 오랜 세월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자가 취재해서 기사를 쓰면 편집부가 판을 짜고 제목을 달고, 제작부서와 공무국이 판을 정리하면 신문사의 윤전기가 돌아가며 신문이 찍혀 나온다. 그 흐름의 가운데에서 이평원 님은 오랫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켜왔다. 
   수십 년의 신문사 생활은 은퇴와 함께 끝났지만, 신문과의 인연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느티나무도서관에서 신문스크랩 자원활동을 하며 다시 신문과 함께하고 있다. 


다시 시작한 신문스크랩


   
동네를 지나다니며 우연히 눈에 들어온 느티나무도서관, 자원활동은 작은 우연들이 쌓여 시작되었다. 스쳐 지나가며 느티나무도서관의 활동에 관심이 생겼고, 한 번 들어가 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이평원 선생님. 마침, 시간적 여유가 생겼고, 행정복지센터에서 봉사활동 시간이 쌓이면 점수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점수가 목적이었죠”라며 조금 머쓱하게 웃으며 말한 이평원 님은 이제 도서관에 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건 다름 아닌 3층의 사서들이었다고 말했다. 
   “3층 사서님들이 정말 잘 챙겨주셨어요. 말 한마디라도 아주 호감이 가는 말들이었어요. 
   그래서 괜히 여기서 봉사한다고 와서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시간만 보내고 가서는 안 되겠다. 할 때는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이 느껴지는 말 앞에서 이평원 님은 자신도 대충 시간만 보내고 갈 수는 없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신문스크랩을 할 때는 이평원 님의 확고한 기준이 있다. 정치나 사회 이슈, 시사성이 짙은 기사들은 일부러 피하는 편이다. 이런 기사들은 TV나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더 빨리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은 조금 더 기록에 남길만한, 흔치 않은 기사에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문학이나 자연과 관련된 주제의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다만 주제가 조금 더 다양해지면 더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도 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평범하게 잘 살아온 것이 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오랜 시간 몸담았던 치열한 서울을 뒤로하고 용인으로 내려온 지 어느덧 여러 해가 지났다. 젊은 시절 신문사와 노동조합에서 바쁘게 활동한 이평원 님은 ‘이제는 조용한 곳에서 조금은 느긋하게 살아보자’라는 마음으로 용인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은 재건축으로 집값이 훌쩍 뛰어버린 예전 동네를 떠올리며 허허 쓴웃음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내 지금의 조용한 생활이 주는 편안함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일상은 소박하지만 단단하게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 가족과의 유대가 그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외에 사는 동생이 한국에 올 때면 여섯 남매가 모여 식사를 하고, 화성에 있는 부모님 산소도 찾는다. 자녀들에 대한 애정도 깊다. 일본에서 자리를 잡은 아들과 가정을 꾸린 딸을 떠올리며, 가족 간의 대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꼽았다. 
 "부모와 자식 간에 대화가 있어야 해요. 자식은 부모의 의사를 듣고, 부모는 자식의 얘기를 들어야 서로 간의 도리를 지킬 수 있죠."

   바쁘게 돌아가던 신문사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평원 님을 지탱해 준 또 다른 힘은 꾸준한 취미 생활이다. 동료들과 남한강으로 수석을 주우러 다니고, 기형적으로 생긴 난을 찾아다니며, 매번 우체국에 찾아가 최신 우표를 수집하는 일상. 옷장에 옷 대신 우표를 넣어두는 바람에 아내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은퇴 이후에도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즐기고 있다. 최근에는 산악마라톤에 푹 빠졌다고 했다. 작년에는 인왕산 30km와 도봉산 50km 코스를 뛰었고, 올해 하반기에 열릴 대회도 참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이 아직도 그렇게 뛰느냐며 종종 놀리곤 하지만, 이평원 님의 마음은 이미 대회로 향하고 있다. 
   "취미생활을 엮어가면서 직장 생활도 하고, 가정생활도 평범하게 잘 살아온 것이 나한테는 복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라 말하는 이평원 님의 목소리에는 지나온 삶에 대한 긍정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전쟁과 온갖 사회운동을 다 겪으신 선생님의 삶이 평범하다니요”라는 예비사서의 말에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희생하더라도 지켜온 굳은 심지


   이평원 님의 삶을 관통하는 모토 중 하나는 ‘사회를 위한 희생’이었다. 이는 젊은 시절 신문사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모습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났다. 40, 50대 무렵,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안정을 추구해야 할 시기에 이평원 님은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의 부위원장을 맡아 ‘공정 보도’의 목소리를 내며 운동을 이끌었다. 
   “자신의 주장만이 최고다 하고 사는 게 아니라, 내가 희생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거죠.”
   당시 주변인들의 반대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나섰던 이유는 분명했다. 정부의 지침대로만 기사를 쓰는 것은 언론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 운동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라 굳게 믿었다.  비록 지금의 언론들이 선배들이 닦아놓은 공정 보도의 길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것 같다며 아쉬움도 내비쳤지만, 이평원 님은 당시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나의 희생이 조금이라도 사회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 거기에 일조했다는 것에 자부심이 있어요. 내 삶이 틀리지 않았다고 봐요."


   젊은 시절의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은퇴 후 동네에서의 자원활동으로도 이어졌다. 동사무소의 연락을 받고 시작한 주민자치위원 일은 보수가 없고, 시간과 품이 필요한 일이다. ‘이 나이에 편하게 쉬지 않고 왜 굳이 사서 고생을 하느냐’라는 반응도 있지만, 이평원 님의 생각은 확고했다. 
   “봉사라는 건 필수 불가결한 거예요. 사회생활에 있어서 그것이 있어야만 사회가 잘 굴러간다고 생각해요. “
   자신의 이익만 챙기기보다 누군가는 봉사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작은 행동들이 모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이 된다는 것이 이평원 님이 오랜 시간 지켜온 생각이다. 시대가 흐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달라졌지만, 사회에 보람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여든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평원 님은 덤덤하지만, 힘 있게 이야기했다.
  "저 사람은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기본적인 굳은 심지는 갖고 살았구나, 그런 인상을 주고 싶어요."
  시대의 풍파 속에서도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고, 은퇴 후에도 자원활동을 이어 나가는 이평원 님의 삶은 이미 그가 바라는 모습 그대로 단단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2026. 06. 16. ~ 2026. 06. 30.
인터뷰: 예비사서 김소연, 박건혁, 박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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